
일단 쿠팡에서 색연필 세트부터 주문했다
갑자기 퇴근하고 집에 오는데 너무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유튜브를 뒤지다가 색연필로 보태니컬 아트나 간단한 강아지 초상화를 그리는 영상을 봤는데, 너무 쉬워 보이는 거다. 그래, 이게 내 새로운 취미다 싶어서 바로 쿠팡에 들어갔다. 전문가용은 너무 비싸고 12색은 좀 아쉬울 것 같아서 대충 36색 정도 되는 적당한 브랜드의 색연필을 샀다. 가격은 2만 4천 원 정도였나. 생각보다 저렴해서 일단 질렀다. 같이 온 종이는 너무 얇아서 다이소에서 스케치북을 하나 더 사 왔는데, 이것도 천 원인가 이천 원인가 했다. 사실 그림 도구보다 배송비가 더 아깝게 느껴지는 기분, 뭔지 다들 알지 않나.
스케치 단계에서 이미 벽에 부딪혔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는 게 생각보다 정말 어렵다. 유튜브에선 슥슥 몇 번 그으면 강아지 눈이랑 코가 툭 튀어나오던데, 내가 그리니까 이건 뭐 생명체가 아니라 그냥 찌그러진 감자 같았다. 처음에 유튜브를 보면서 따라 할 때는 선 하나 긋는 것도 손이 덜덜 떨렸다. 옆에 둔 지우개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모르겠다. 종이가 구멍이 날 정도로 지웠다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강아지 세 마리를 그리려다가 결국 한 마리로 타협했는데, 그것마저도 비율이 안 맞아서 한참을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누가 그림이 정서 안정에 좋다고 했나. 나는 오히려 그리면서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색을 입히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밑그림이 겨우 완성돼서 색을 입히기 시작했는데, 색연필이 내 마음처럼 발색이 안 된다. 꾹 누르면 부러질 것 같고, 살살 칠하면 색이 텅 빈 느낌이다. 특히 강아지 털 질감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이건 뭐 그냥 색칠 공부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파스텔 톤의 목도리를 예쁘게 칠해보려고 했는데, 경계선이 뭉개져서 결국 검은색으로 선을 따야 했다. 다이소에서 산 2천 원짜리 색연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십만 원짜리 전문가용이랑 비교할 건 못 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칠하다 보면 손끝에 가루가 잔뜩 묻어서 중간에 화장실 가서 손도 몇 번 씻었다.
우드 액자에 넣으면 좀 나아질까 했는데
다 완성하고 나니 그래도 내가 그린 거라 나름 애착은 가더라. 그래서 다이소에 갔을 때 봐뒀던 우드 액자를 사 왔다. 3천 원인가 5천 원이었는데, 액자 크기에 맞추려다 보니 그림 테두리를 가위로 잘라내야 했다. 어렵게 그렸는데 잘라내는 마음이 좀 씁쓸하긴 했다. 그래도 액자에 딱 넣어서 책상 위에 올려두니까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멀리서 보면 꽤 괜찮다. 가까이서 보면 털 방향이 엉망이지만, 뭐 누가 그렇게 자세히 보겠나 싶기도 하고.
다시 시도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림 하나 끝내는 데 대충 3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퇴근하고 와서 씻고 밥 먹고 바로 시작했는데, 다 하고 나니 시계가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뿌듯하긴 한데 매일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시스트 알바라도 해볼까 싶어서 유튜브로 독학하는 사람들을 찾아봤는데, 다들 나보다 훨씬 잘 그리는 것 같다. 나는 그냥 취미로 남겨두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제주의 식물이나 꽃을 그려보라고 권하던데, 그건 강아지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아서 조금 망설여진다. 일단 사둔 색연필이 아까워서라도 조만간 다시 펼치긴 하겠지만, 왠지 또 스케치북만 만지작거리다 끝날 것 같다.
강아지 그림 비율 때문에 얼마나 답답했는지 ㅠㅠ 저도 처음 그림 그릴 때 비슷한 경험이라서 완전 공감이에요.
색연필로 보태니컬 아트 영상을 보니, 털 질감 표현이 그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