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사팀에서 날아온 메일 한 통
월요일 아침부터 팀장님이 인사팀에서 온 메일이라며 KPI 설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예전에는 그냥 적당히 대충 써서 제출하면 그만이었는데, 올해부터는 팀 전체의 방향성과 개인의 성과가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둥 꽤 거창한 공지가 덧붙어 있었다. 사실 회사가 말하는 ‘핵심성과지표’라는 게 현장에서 일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저 1년에 한 번 하는 연례행사 같은 거다. 그래도 평가라는 게 얽혀 있으니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서 점심시간 직전에 부랴부랴 엑셀 파일을 열었다.
억지로 만들어낸 숫자들의 의미
뭘 적어야 할지 몰라 화면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평소 하는 업무라는 게 매일 들어오는 고객 문의를 처리하고, 간혹 들어오는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는 일의 반복인데 이걸 수치화하려니 머리가 아팠다. 작년에는 대충 ‘고객 만족도 90% 달성’이라고 적었다가 팀장님한테 퇴짜를 맞았었다. 구체적인 방법론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번엔 좀 다르게 해보려고 ‘처리 시간 단축’이라는 키워드를 잡았다. 구체적으로는 일 평균 처리 건수를 15건에서 18건으로 늘리겠다는 목표였다. 이게 실현 가능한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일단 서류상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비용 절감이라는 뻔한 타겟
회의실에서 다 같이 모여 앉아 목표를 공유할 때 다른 팀원들도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옆 자리 대리는 ‘불필요한 리소스 10% 절감’ 같은 거창한 수치를 내걸었다. 회사가 에너지 절감이나 폐기물 저감 목표를 600톤씩 잡는다는 뉴스 기사를 어디서 봤는데, 우리 부서는 그런 거창한 수치가 나올 리가 없다. 결국 내 자리에 돌아와서 나도 비슷하게 소모품 사용량을 줄이겠다는 항목을 추가했다. 볼펜 하나, 종이 한 장 아끼는 게 성과가 될 수 있을까 싶지만 딱히 다른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매달 5만 원 정도 나가는 부서 간식비를 4만 원대로 줄이겠다는 목표까지 적고 나니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혼란스러운 우선순위 설정
목표를 다 세우고 나니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정말 이걸 달성하려고 일을 하는 건지, 아니면 이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을 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대학생 때 한국사 3등급 받겠다고 밤새우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그 점수가 내 미래를 결정할 줄 알았는데 막상 직장에 들어와 보니 KPI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어제는 팀장님이 호출해서 ‘이 지표는 너무 낮은 거 아니냐’며 20% 상향 조정을 요구했다. 결국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숫자는 바뀌었고, 이 목표치가 진짜 의미가 있는지 이제는 따지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들
이렇게 세워둔 목표가 연말까지 얼마나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보통 3월쯤 되면 다들 잊어버리고 각자 하던 일이나 하다가 11월쯤 되어서야 부랴부랴 수치를 맞춘다. 작년엔 그랬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에 가서 멍하니 전시를 보고 있으면 ‘내 삶의 성과’라는 게 참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는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설정해서 빛과 자연을 전시하는데, 내 삶은 고작 3개월 단위의 KPI에 얽매여서 숫자 놀음이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퇴근길에 지하철을 기다리며 앱을 켜서 달성률을 체크해 봤는데, 진척도 5%라는 숫자가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KPI 때문에 밤새워 일하는 모습이 정말 공감돼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마치 게임처럼 숫자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게 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