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설픈 계획표가 결국 책상 서랍 구석으로 밀려난 이유
매년 이맘때쯤이면 회사에서 인사평가 시즌이라고 난리를 친다. OKR이니 뭐니 하면서 거창한 단어들을 가져다 붙이는데, 사실 내 실무랑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작년 1월에도 그랬다. 팀장님이랑 1:1 면담을 하면서 내 업무 목표를 설정하는데, 거의 한 시간을 씨름했다. 결국 나온 결과물은 ‘상반기 내 프로젝트 완료 및 효율 15% 개선’ 같은 건데, 이걸 어떻게 수치화하냐고 물어보니 그건 알아서 논리적으로 증명하라는 식이었다.
비용도 문제였다. 우리 부서 전체 예산이 400만 원 정도 잡혀 있었는데, 이걸 효율 개선을 위해 쓴다기보다 사실상 보여주기식 소프트웨어 구독료로 다 나가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엑셀 창 하나 더 띄워놓고 목표 달성률을 꾸준히 적어 내려갔지만, 이게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이게 과연 ‘자기계발’인가, 아니면 그저 시스템이 원하는 ‘데이터 채우기’인가 하는 점이었다.
사람 관계 속에서 목표가 꼬여버리는 지점들
업무 목표보다 더 골치 아픈 건 인간관계다. 최근에 친하게 지내던 동료가 갑자기 이직을 준비하면서 팀 분위기가 묘해졌다. 목표를 설정할 때 ‘동료들과의 협업 지수’ 같은 항목을 넣으라고 해서 넣어놨는데, 정작 그 동료는 팀 프로젝트보다는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더 집중하고 있었다.
이게 참 애매하다. 나는 계획대로 일을 추진해야 하고, 상대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매번 회의 때마다 우리가 설정한 목표는 공중분해 되기 일쑤였다. 결국 남은 건 나 혼자 야근하며 엑셀 표를 수정하는 일뿐이었다. 작년 가을쯤이었나, 9시 넘어서 사무실에 혼자 남아 모니터를 보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싶더라. 수토피아 같은 커뮤니티에서 본 글귀들이 떠올랐다. ‘인간은 시스템의 부품이 아니다’라는 말. 그런데 막상 현실에선 시스템이 정해준 목표에 나를 맞추지 않으면 당장 눈앞의 인사평가가 깎이니, 어쩔 수 없이 굽히고 들어가는 거다.
체중계 숫자처럼 흔들리는 나의 계획들
뱃살 다이어트할 때도 비슷하다. 체중계 숫자가 목표가 되면 하루하루가 예민해진다. 요즘 점심값으로 보통 1만 2천 원에서 1만 5천 원 정도 쓰는데, 식단 관리를 한다고 샐러드를 시키면 돈은 더 나가고 포만감은 적고. 그러다 저녁에 지쳐서 치킨이라도 한 마리 시키면 다음 날 아침에 체중계 숫자가 0.5kg 늘어 있다.
이걸 보면서 느꼈다. 업무 목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숫자로 딱 떨어지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사람을 더 망가뜨리는 것 같다. 차라리 ‘허리둘레를 줄이자’처럼 좀 더 본질적인 걸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우리 회사는 매번 ‘몇 퍼센트 성장’ 같은 수치만 요구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예전에 들었던 외부 컨설턴트 강연에서는 ‘유연한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막상 우리 팀 회의 때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팀장님은 ‘그건 실무 모르는 사람들의 이상론’이라며 잘라버렸다.
기록을 남기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
요즘은 그냥 닥치는 대로 일한다. 목표 설정 시트에는 적당히 현실적인 수치들을 넣어두고, 나중에 평가받을 때 변명할 거리들을 조금씩 마련해 두는 방식이다. 이게 비겁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반대로 보면 이게 내가 이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어제는 문득 내가 5년 뒤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지금의 이 지루한 목표 설정 과정들이 다 밑거름이 될까? 아니면 그냥 낭비된 시간으로 남을까? 확실한 건, 지금 내가 기록하는 이 생각들도 결국 나중에 보면 별거 아닌 고민으로 남을 것 같다는 점이다. 그래도 기록이라도 안 해두면 내가 왜 그때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까먹을 것 같다.
아직도 완벽한 해결책은 찾지 못했다. 그냥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적당히 끝내고 집에 가서 유튜브나 좀 보다가 자는 게 내가 가진 최선의 계획이다. 이런 식의 목표 설정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이제는 구태여 판단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이 조금씩 커지는 것 같다.
엑셀에 계속 숫자를 적는다는 게 사실은 데이터 분석 능력을 키우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과정이 본질적인 성장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