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 방에 쌓여가는 책들과 나의 조급함
거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4세 전집 박스를 처음 뜯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화려한 색감과 빳빳한 종이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우는데, 왠지 모를 뿌듯함과 동시에 묘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그때는 이게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굳게 믿었다. 주변에서 하도 독서 습관이 중요하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줘야 나중에 공부를 수월하게 한다 같은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으니까. 사실 나부터도 책 읽는 시간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게 찜찜했는데, 아이를 핑계 삼아 책을 들여놓으면 나도 다시 읽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사소한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200만 원이라는 숫자의 무게감
그 당시에 산 전집이 얼추 200만 원 정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지만, 그 당시에는 뭐라도 해줘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던 것 같다. 아기 돌 선물로 들어온 현금이나 상품권을 털어 넣고 부족한 건 할부로 메웠다. 매달 나가는 카드값 명세서를 볼 때마다 아이가 책을 읽든 안 읽든 일단 펼쳐는 놔야 한다는 숙제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집이 오고 나서는 거실 벽면이 꽉 찼는데, 아이는 정작 책보다는 책장 앞에 있는 택배 박스를 더 좋아했다. 책을 읽어주려고 자리에 앉히면 3분도 못 버티고 딴짓을 하러 가버리는데, 그때마다 내가 돈을 낭비하고 있는 건가 싶어 혼자 속을 끓였다.
독서 논술 학원과 유튜브 사이의 고민
아이가 조금 더 크니까 이제는 독서 논술 학원을 보내야 하나 싶은 고민이 시작됐다. 주변 엄마들은 벌써부터 무슨 수업을 듣는다더라, 어느 학원 관리 프로그램이 좋다더라 하며 정보를 공유하는데 나는 그 대열에 끼지 못하는 것 같아 불안했다. 한 달에 십오만 원에서 이십만 원 정도 하는 수업료를 보며 이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 싶었다. 학원 차를 기다리느라 길가에서 서성이는 시간, 숙제 봐주느라 씨름하는 시간들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피로가 몰려왔다. 결국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전자책도서관 서비스를 신청해봤는데, 이게 종이 책보다 휴대는 편해도 아이랑 같이 화면을 보는 게 영 집중이 안 됐다. 결국 아이는 내가 옆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보기는커녕, 내가 스마트폰으로 학원 검색이나 하고 있는 모습만 보게 된 꼴이다.
다시금 돌아보는 읽는다는 것의 의미
얼마 전 한병철의 책을 읽다가 디지털 문명에서는 마음이 미끄러진다는 구절을 보고 멍해졌다. 나도 매일 밤 아이 재우고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과연 나는 아이에게 책 읽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 며칠 전에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TV를 끄고 20분 정도 아이 옆에서 조용히 책을 펴봤다. 아이가 처음에는 신기한 듯 옆에 오더니 금세 장난감을 가져와 내 무릎에 올린다. 같이 놀아주면서 틈틈이 한 페이지씩 읽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안 나간다. 어떤 날은 완독을 목표로 잡았다가 서너 줄 읽고 지쳐 잠들기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읽던 시절에는 반전이 궁금해서 밤을 새우기도 했는데, 요즘은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정답 없는 일상을 그냥 견디기로 했다
이제는 전집을 새로 들이는 것보다 아이랑 도서관에 가는 횟수를 늘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대단한 독서 교육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가 책이라는 물건을 낯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정도다. 가끔은 내가 너무 보여주기식 독서에 집착하는 건 아닌가 싶어 씁쓸할 때도 있다. 200만 원짜리 전집은 지금 거실 구석에서 반쯤은 펴지지도 않은 채로 먼지를 머금고 있다. 이걸 중고로 팔아야 할지, 아니면 둘째가 생길 때까지 그냥 둬야 할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둬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결론을 내리려니 자꾸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서 그냥 이번 주말에는 아무 생각 없이 동네 도서관이나 한번 더 다녀오려고 한다. 책이 내 삶을 바꿔줄 거라는 거창한 기대는 버린 지 오래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읽고 아이랑 뒹굴다 보면 언젠가 우리 사이에도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독서의 기억 하나쯤은 남지 않을까 싶다.
책 읽는 시간을 아이랑 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저도 가끔 아이에게 보여주려 애쓰지만, 아이는 또 다른 재미를 찾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