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초마다 KPI 세우다가 지쳐버린 기록

매년 연초마다 KPI 세우다가 지쳐버린 기록

목표를 적는 것이 왜 이렇게 무거운 숙제 같을까

매년 1월이 되면 으레 하던 습관이 있다. 노션 페이지를 하나 새로 파고 그해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가는 것. ‘일잘러’가 되고 싶어서, 혹은 남들 다 하는 자기계발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참 열심히도 적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매달 KPI를 체크하겠다며 엑셀 파일까지 만들어 뒀는데, 막상 3월쯤 지나면 그 파일은 내 컴퓨터 구석에서 먼지만 쌓이는 신세가 된다. 이상하게도 내가 세운 목표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압박하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예를 들어 ‘영어 회화 실력 향상’ 같은 목표를 적어두면, 퇴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넷플릭스라도 보면서 쉬고 싶다가도 괜히 죄책감이 든다. 어제 쓴 일기장을 다시 펼쳐보니 작년 7월에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더라. 왜 나는 매번 같은 함정에 빠지는 걸까.

숫자로 관리되는 삶이 주는 묘한 피로감

금융권 뉴스나 컨설팅펌에서 흔히 쓰는 용어들이 일상으로 침범해 올 때가 있다. 보통주자본비율이 13%가 넘어야 한다거나, ROE를 12%로 상향한다는 기사를 보면 문득 내 삶은 어떤 수치로 평가받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토스증권 연금저축계좌 앱을 열어보면 ‘입금 목표액’을 설정하라고 나오는데, 그 작은 화면 속 숫자를 보면서도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 삶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한 도구들이 오히려 나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느낌이랄까. 회사에서도 분기별로 목표 설정 면담을 하는데, 거기서 쏟아내는 말들과 내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목표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단순히 효율성이나 성과 위주로만 내 일상을 재단하고 싶지 않은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이번 달 독서 목표 3권’ 같은 식의 정량적인 결과물에만 집착하고 있다.

무작정 시작한 목표가 오히려 독이 된 경험

한번은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새벽 5시에 일어나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미라클 모닝’이라는 게 한창 유행할 때였는데, 비용은 들지 않았지만 대가는 컸다. 일주일 정도는 의욕적으로 해냈다. 그런데 그게 습관이 되기보다는 그냥 잠만 부족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오전 업무 시간에 집중력이 떨어져서 퇴근이 늦어지는 악순환이 생겼다. 친구들은 ‘너는 목표 설정 단계부터 너무 거창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작년에 지원 준비를 할 때도 BFA를 할지 MFA를 할지 고민하며 수많은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뒤졌지만, 정작 내 본질적인 고민보다는 서류 통과율에만 급급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목표를 위한 목표만 세우다가 지쳐버린 꼴이다.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도 달라지지 않는 것들

최근 국립암센터나 병원계에서 회복 프로그램에 대해 다루는 글들을 읽었다. 치료 이후의 삶을 위해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며 대인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거기서는 목표라는 게 무조건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나를 돌보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런 글을 읽을 때는 ‘그래, 맞아’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또다시 투두 리스트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33살이라는 나이가 주는 압박감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성실함이 미덕인 사회에서 자란 탓일까. 무릎 관절염 치료 목표가 ‘통증 감소’와 ‘기능 유지’이듯, 내 삶의 목표도 조금은 더 담백해질 필요가 있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막연함 속에서 걷는 지금의 방식

오늘도 별자리 운세를 보며 ‘과로 전 일정 축소’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이게 참 웃기지만 나름의 위로가 된다. 거창한 5개년 계획을 세우는 대신, 오늘 당장 해야 할 일 중에서 하나를 덜어내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훨씬 더 필요한 목표 설정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리해서 무언가를 성취하려 애쓰기보다는, 그저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정도의 속도로만 가려고 한다. 완벽한 자기계발은 없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 중이다. 가끔은 이렇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은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수행’이 아닐까 싶다. 내년 1월이 되면 또다시 나는 바보처럼 목표를 적고 있겠지만, 그때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이었으면 좋겠다.